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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07-21 20:48
발톤 스톤(Barton Warren Stone) - 6. 교회와 사회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2,393  

발톤 스톤(Barton Warren Stone, 1772-1844)

출저: D. Newell Williams, "Stone, Barton Warren (1772-1844)," The Encyclopedia of the Stone-Campbell Movement(Grand Rapids, Michigan: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2004)
번역: 조동호 목사(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
역자 주: D. Newell Williams는 그리스도의 제자들 소속 Brite Divinity School의 교수

목차

1. 서론
1.1 성인 같은 성품
1.2 신학적 논객
1.3 부와 접대

2. 장로교 목사 되기
2.1 가족 배경
2.2 교육
2.3 회심과 목회소명
2.4 삼위일체론에 대한 초기 난관들
2.5 연이은 신학적 난관들과 또 다른 소명을 찾으려한 결심
2.6 설교자격증과 안수

3. 대부흥회
3.1 남부 켄터키 주 부흥회 방문
3.2 믿음에 대한 새 빛
3.3 북부 켄터키 주 부흥회 진작과 엘리자베스 캠벨(Elizabeth Campbell)과의 결혼
3.4 켄터키 주 노회와의 결별

4. 그리스도인의 교회
4.1 유언서와 그리스도인의 이름
4.2 대속에 대한 새 빛
4.3 이전 동료들과의 결별과 신자들의 침수세례를 채택
4.4 <<제언>>(An Address) 출판, 셀리아 보웬(Celia Bowen)과 재혼, 테네시 주로 이주
4.5 켄터키 주로 귀환
4.6 삼위일체론과 대속론에 관한 논쟁을 일신

5. 알렉산더 캠벨의 추종자들과 연대

6. 교회와 사회
6.1 노예제도에 대한 초기 반대
6.2 해방 흑인들의 이주 지원 및 일리노이 주로 이사
6.3 노예제도의 즉각적인 폐지 지원
6.4 노예, 그리스도인 연합, 전 천년설
6.5 반정부입장 채택 및 평화주의

7. 스톤-캠벨운동과 그리스도인 연합에 관한 후기 회상
8. 죽음과 장사
9. 스톤-캠벨 운동에 관한 스톤의 영향
참고목록

6. 교회와 사회

6.1 노예제도에 대한 초기 반대

스톤은 캐인 리지(Cane Ridge)와 콘코드(Concord) 소재 회중들(교회들), 즉 그들의 반노예제도 정서들에 대해서 이미 알려진 회중들 사이에 정착한지 얼마 못되어 노예제도의 반대자가 되었다. 이웃 장로교회의 목사 사무엘 렌널즈(Samuel Rennels)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톤은 왜 그가 노예해방에 찬성하는지를 8가지 이유로 설명하였다. 편지 가운데 날짜와 첫 세 가지 이유들이 적힌 부분은 분실되었다. 남아 있는 다섯 가지 이유들은 노예제도의 잔인성과 가족 책무들 수행의 상반성에 초점이 맞춰진다. 스톤은 단언하기를, “노예제도는 하나님과 인간을 묶는 끈들, 즉 다른 모든 것들의 가장 강하고 분리시킬 수 없는 끈들을 풀어버린다. 이들 끈들 가운데 한 가지가 부부애이다. 사랑하는 남편이 울며 어찌할 줄 모른 채 포옹하고 있는 가장 사랑하는 아내, 즉 짐승처럼 팔려서 멀리 끌려갈 아내에게서 떼어진다.... 어떻게 이 사랑하는 부부의 행복이 끊임없이 파괴되어야 하는가! 필경 그들에겐 자녀들이 있었을 것이다('dear to both'가 선을 그어 지워짐)....”라고 하였다. “말해보라. 이것이 옳을 수 있겠는가? 그것이 선하신 하나님의 뜻에 합치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Or)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우리의 아내들과 결합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그 말씀이?”라고 그는 렌널즈에게 물었다. 스톤은 백인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우리 가운데서” 노예들을 해방시키는 것은 좋은 정책이 아니라고 말한다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그 편지를 끝냈다. “많은 이들이” 다르게 생각했다는 것을 그는 주시하였다. 그는 계속하기를, 어떤 경우든 “자녀들은 시민 정책이 하나님의 명시된 뜻을 반대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을 하는 것이 우리에게 이익이 될 것인가를 우리는 물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1800년 스톤은 캐인 리지와 콘코드 교회들의 결의안을 서(西) 렉싱턴 장로회에 제출하였다. 그 결의안은 노예제도가 “도덕적으로 악하고, 매우 악질적이며, 따라서, 그런 관행이 지속되긴 하겠지만, 교회의 특권들에서 배제시키기에 충분하다”(consequently sufficient to exclude such as will continue in the practice of it from the privileges of the church)고 주장하였다. 장로회는 노예 소유주들은 교회의 특권들에서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이 장로회의 대다수 의견이지만, 그들은 상위의 심판기구들로부터 지시가 떨어질 때까지 그 문제의 결정을 미루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 결의안을 버지니아 주 노회와 총회에 보냈다.

다음 해에 스톤은 그의 모친의 유산으로 물려받았던 두 명의 노예들, 네드(Ned)와 루시(Lucy)를 해방하였다. 부르본(Bourbon) 군(郡) 법원에 제출한 해방 증서에서 스톤은 노예제도는 시민의 자유는 물론이고 기독교의 원칙들에 모순“ 된다고 단언하였다. 그가 보도하기를 30세쯤이었던 네드와 2년 후 그가 보도하기를 12살가량이었던 루시를 해방하기 위한 그의 준비들은 10년 후 점증하는 노예해방의 철학, 즉 해방하기 전에 노예들이 자유를 누릴 준비를 하도록 요구하는 철학과 일치하였다. 스톤은 네드에게 자유를 주기 전에 기술을 연마시켰다. 그는 루시에게 젊은 여인으로서 자유를 주기 전에 그녀에게 기술을 가르칠 뿐 아니라 ”성서와 신앙“으로 키웠다.

1808년에 가서 스톤은 교회에서 노예 소유주들과 교제하는 것에 대한 그의 입장을 바꿨다. 이것은 스톤이 켄터키 주 노회와 결별하면서 시작된 일련의 갈등들의 결과 때문이었을 것이다. 렉싱턴 근교에서 개최된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서 스톤은 “그의 지식이 미치는 한, 그들 가운데 노예들을 소유하고, 그들의 행위와 품행이 올곧은 어떤 교인도 알지 못한다는 것, 그러나 다른 모든 점에서 모범이 될 만한 것, 그들의 상당수가 그날의 짐과 열기를 짊어졌고, 그리스도인의 목적과 이름 때문에 큰 박해를 받았다는 것, 그들에게 단교를 선언하는 것은 너그럽지 못하고 극도로 잔인하다는 것을 말하였다”고 보도되었다. 노예를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영향을 끼쳐 그들의 노예들을 해방하게 하는 최선의 방법은 노예 해방론자들이 그들과 지속적으로 친교 하는 것임을 스톤은 또한 확신했을는지 모른다. 그가 1807년에 신자의 침수세례를 성찬의 수단으로 삼는 것을 반대하였지만, 20년 이내에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침수세례를 받지 아니한 사람이 “500명 가운데 한 명”도 없었다고 그는 나중에 적었다.

6.2 해방 흑인들의 이주 지원 및 일리노이 주로 이사

교회에서 노예 소유주들과 교제하는 것에 대한 스톤의 입장은 또한 노예해방에 대한 경험들을 통해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비록 스톤이 “많은 사람들이” 백인들 사이에서 노예들을 해방하는 것이 좋은 정책이 아니라는 사무엘 렌널즈(Samuel Rennels)의 견해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것을 렌널즈에게 충고하였지만, 스톤의 전기 작가 존 로저스는 “일반적인 것으로써 해방된 흑인들이 갖는 자유라 부르는 무언가가 그들과 백인 모두에게 불행이다”는 “이어진 관찰”이 스톤을 확신시켰다고 적었다. 그래서 1820년대 기간에 스톤은 미주 이주 단체(American Colonization Society)의 열렬한 주창자가 되었다. 그의 진술된 목적은 “미주 대륙에서든 아프리카 대륙에서든 이주민 거류지(a colonial retreat)를 마련함으로써 현재 미국에 거주하는 해방 유색 국민의 상태(Free People of Colour)를 개선하려는 것이었다.“ 사회집단의 설립자들은 노예 소유주들이 그들의 이동을 확신한다면 그들의 노예들을 해방시킬 것이라고 믿었다. 자발적인 기구로써 1816년에 설립된 그 사회집단은 국민기금조성을 추구하였다. 1821년 서부 아프리카에 부지를 구입하여 연방정부와 주정부에 해방 흑인들을 아프리카에 이주시킬 수 있음을 과시하기 위해서 라이베리아 이주지(the colony of Liberia)를 세웠다.

1834년 9월호 <<크리스천 메신저>>(Christian Messenger)는 그해 가을 일리노이 주 잭슨빌(Jacksonville)로 이사하려는 스톤의 의도를 담은 통지를 실었다. 비록 스톤은 자신의 이주 결심에 대한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지만, <<크리스천 메신저>>(Christian Messenger)의 오랜 독자들은 그것이 노예제도에 대한 그의 반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1830년 12월에 스톤은 그가 노예 소유주가 되었다는 루머를 해명하였다. 루머의 근거는 스톤이 조지타운에 있는 그의 집에 한 명의 아프리카 남성과 두 명의 아프리카 여성과 네 명의 아프리카 아이들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스톤은 이 사람들이 고인이 된 장모의 유언, 즉 그들을 수탁자들의 지배아래 놓고 있는 유서에 따라 그의 아내와 자녀들에게 영구히 유산으로 남겨졌다고 설명하였다. 그는 그가 그들을 해방시킬 수 없으므로, 그는 그 자신과 그의 가족들을 그들로부터 해방시키려는 경향이 심각하였다고 진술하였다. 그 같은 노예해방은 그의 가족이 자유로운 주(州)로 이사함으로써 실현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경우에 그의 아내와 자녀들에게 유언으로 남겨진 노예들은 해방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현실로 나타날 것이다.”고 덧붙였다.

1830년에서 1835년까지 스톤은 일리노이 주 잭슨빌 부근에 네 개의 부지를 구입하였다. 1832년 10월 30일에 광장 남쪽 두 블록 떨어진 잭슨빌에 그의 집터가 될 세 개의 부지를 매입하였다. 1834년 늦은 가을 스톤과 그의 가족은 그들의 새로운 집으로 이사하였다. 4년 후에 스톤은 그의 아내와 자녀들에게 유언으로 물려진 아프리카인들에 관한 그의 의도가 이뤄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을 만족해하였다. 켄터키에로 여행 중일 때 스톤은 예전의 노예들이 자유인의 한 가족으로서 조지타운에 살고 있는 것을 알고 방문하였다.

6.3 노예제도의 즉각적인 폐지 지원

스톤은 1830년대 초 내내 계속해서 이주 단체(Colonization Society)를 장려하였다. 그러나 1833년까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노예들을 해방시켜 그들이 라이베리아로 가는 것을 허락하지 못한데 대해서 실망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스톤의 일리노이 주(州)로의 이사는, 아프리카인들을 미국에 그대로 남겨둔 채, 이주 계획(colonization scheme)의 포기와 노예제도의 즉각적인 폐지 요구의 승인과 동시에 일어났다. 1835년 4월호 <<크리스천 메신저>>(Christian Messenger)에서 스톤은 윌리엄 로이드 게리슨의 뉴잉글랜드 반노예제도 단체가 쓴(by William Lloyd Garrison's New England Anti-Slavery Society) “미국 국민에게 보내는 노예제도에 관한 제언”(Address to the People of the United States on Slavery"의 연재를 시작하였다.

스톤은 3회분을 실은 후에 “제언”의 출판을 그만 두었다. 그 대신에 그는 <<크리스천 메신저>>(Christian Messenger) 7월호에서 바람직하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즉각적인 폐지를 옹호하는 두 개의 기사들을 실었다. <<크리스천 메신저>>(Christian Messenger)의 11월호에서 그는 왜 그가 “뉴잉글랜드 반노예제도 단체의 제언”의 연재를 6월에 3회째 분을 싣고 나서 그만뒀는지를 설명하였다. “제언”을 싣기 시작한지 얼마 못돼서 “북부에서 극단적인 폐지주의자들의 나쁜 영향들에 대해서 들었고, 더 이상 싣지 않기로 결정하였으며, 현재의 흥분상태에서는 좋게 하기보다는 해롭게 할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납득하였다. 그가 언급한 나쁜 영향들은 폐지론자들에 반대한 소란들이었고 폭력적인 행동들이었으며, 노예제도를 폐지하려는 모든 노력들에 반대한 노예제도 지지자들의 점증하는 저항이었다. 그는 ”이들 몇 회분들의 출판에 대해서 동부와 남부에 사는 나의 오랜 후원자들과 친구들 여려 명이 불쾌한 일을 당했고, <<크리스천 메신저>>(Christian Messenger)의 중단을 주문하였다고 적었다. 그는 단언하기를, “나는 거의 40년 동안 노예제도의 양심적 반대자였던 원칙과 실천이 있으나 악행들을 고칠 방법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나는 그것이 이뤄져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을 성취할 수단에 대해서 무지하다.”고 하였다.

6.4 노예, 그리스도인 연합, 전 천년설

스톤은 노예제도가 천년왕국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란 것을 확신하였다. 게다가 그는 천년왕국이 가까이 왔다고 확신하였다. 천년설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그가 다시 오시기 전에 성도들과 함께 지상에서 천년동안 영적으로 통치하실 것이라고 믿었다. 천년설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천년왕국이 시작될 때에 심판 가운데 오실 것이고 천년동안 성도들과 함께 지상에서 개인적으로 통치하실 것이라고 믿었다. 스톤은 적어도 1830년대 이후로부터는 전천년설론자였다. 스톤의 천년왕국론의 열쇠는 스톤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선행될 것이라고 믿었던 두 가지, 즉 “유대인들의 돌아옴(회개)과 구원”과 “들어온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그리스도인들의 연합에 좌우된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스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의 연합은 천년이 바뀌는 중심점이었다. 스톤은 하나님께서 19세기에 교회를 연합하기 위해서 일하고 계시다고 믿었기 때문에 천년왕국이 가까웠고, 또 그것과 더불어 노예제도의 폐지를 지속적으로 확신하였는데, 1835년에 그가 인정했던 것처럼, 심지어 그것이 폐지될 수단을 그가 몰랐던 때에도 그랬다.

한편 스톤의 전천년설은 그에게 그리스도의 임박한 심판의 위협으로 노예 소유주들에게 그들의 노예들을 해방하라고 권고하도록 용기를 불어넣었다. <<크리스천 메신저>>(Christian Messenger)에서 스톤의 첫 번째 전천년설의 적용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노예들을 해방하고 그들을 라이베리아로 가도록 허락하라는 그의 마지막 호소가 되고 만 것에서 나타났다. “노예들이 그 속에 포함된 바빌론의 상품들을 주님께서 오실 때 우리 가운데서 발견되게 하지 말라”고 1833년에 그는 충고하였다. “보라. 그가 신속히 오신다.” 스톤은 그가 왜 뉴잉글랜드 반노예제도 단체의 “제언”을 그만 뒀는가를 설명한 후에 그의 전천년설을 1835년 11월에 두 번째로 <<크리스천 메신저>>(Christian Messenger)에서 적용하였다. 그는 그의 독자들에게 “원칙과 실천들을 시세에 영합함으로써 그들의 기초인 성서에서 쓸려나가는 것을 경계하도록” 권고하였다. “의로운 심판의 날은 가까웠다. - 주님이 오실 때 우리가 흠과 점이 없이 발견될 수 있도록, 육체와 영혼의 모든 더러움으로부터 너희 자신들을 깨끗이 씻음으로써 그날을 준비하라.”고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충고하였다.

6.5 반정부입장 채택 및 평화주의

1820년대 스톤은 의회가 해방 노예들의 이주를 책임지라(to fund)고 요구하는 청원서에 그리스도인들이 서명하도록 요청하는 것을 찬성하였다. 1840년대까지 미국인들이 노예제도를 종식시키지 못한 것으로 인한 스톤의 환멸과 나타난 대중적인 선거운동에 대한 그의 반대가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인들이 시민 정부에 참여하지 말아야한다는 것을 제안하도록 만들었다. 스톤은 이 제안을 1842부터 1844년까지 발행된 네 개의 시리즈 기사들, 즉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고 소지한 민간과 군(軍)의 직책들”(Civil and Military Offices Sought and Held by Christians), "옛 시대의 반성“(Reflections of Old Age), ”T. P. 웨어에게 보낸 답장“(Reply to T. P. Ware)[시리즈의 첫 회분 기사에 대응하여 스톤에게 편지를 보낸 미시시피의 변호사와 그리스도인] 그리고 ”신구(新舊) 설교가 사이의 인터뷰“(An Interview between an Old and Young Preacher)에 관한 두 “그리스도인 형제” 사이의 대화를 제시하였다. 이들 네 개의 기사들에서 스톤은 왜 그리스도인들이 정부에 참여하지 말아야하는지에 대해서 두 개의 논의를 발전시켰다. 첫 번째 논의는 정부에의 참여가 그리스도인의 영성에 부정적인 충격을 갖는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영적 통치와 예수님의 법들이 세상을 통치하는데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시민 정부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무엇이었는가? 대화에서 스톤의 견해를 대표한 형제는 시민 정부들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의무는 “우리의 왕의 것에 반대 입장에 서지 아니한 그것들과 그것들의 모든 법령들에 복종하는 것”이라고 진술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은 “조세를 지불해야할 자에게 조세를, 관세를 지불할 자에게 관세를, 경의를 표해야 할 자에게 경의를 표해야한다.”고 충고하였다. 그는 사도행전 4장을 언급하면서 상충되는 사례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인류보다는 하나님께 순종한 사도들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단언하기를, 그리스도인들은 인간 정부들을 위해서 또 그들 자신의 정부에서 “매우 활기차고 빛나기 위해서, 모든 인간 정부들보다 그것이 더 우월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수단으로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여 그것을 받게 하고 구원 얻도록” 또한 기도해야한다고 하였다.

정부에 참여하는 것에 관한 질문에 관련된 것이 병역의 이슈였다. 1812년 전쟁이후 미국에서는 평화운동이 나타났다. 평화운동의 대부분의 회원들은 침략과 국방사이에서 무력의 사용을 구분지어 전자만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1838년에 헨리 클라크 라이트(Henry Clark Wright)와 윌리엄 로이드 게리슨(William Lloyd Garrison)이 이끈 그 운동내의 “극단주의자들”은 비저항 단체(Non-Resistance Society)를 구성하여 정당방위(正當防衛)에서조차 무력사용에 반대하였다. 라이트와 게리슨은 비저항의 실천이 지상에 그리스도의 통치를 안내해 드릴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스톤은 1827년 말에 침략에 맞서 그들 자신들을 방어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지지하는 논의를 개진하였다. 1844년 7월까지 그는 비저항의 주창자였다. “기독교를 신앙하는 국가는, 그러면서도 전쟁의 기술을 가르치고 배우고 연습을 한다면, 그리스도의 왕국일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법을 순종하여 사는 것이 절대 아니다. - 그 정부는 반기독교적이며, 가까운 장래에 반드시 그들은 불신앙의 열매들을 거두게 된다.”고 그는 경고하였다.

스톤은 그리스도인들이 시민 정부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그의 견해에 교회 안에서 반대가 있을 것이란 것을 알았다. 1842년 대화에서 스톤의 견해를 대표하는 성격은 그의 견해들이 “광신적 행위 또는 극단주의”로 분류될 것이란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가 말하기를 주저하였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스톤이 그것을 본대로, 그리스도인들이 시민 정부에 참여하지 말아야한다는 그의 제안은 교회와 관련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오랫동안 견지한 견해들의 연장이었을 뿐이었다. 그의 “T. P. 웨어에게 보낸 답장“(Reply to T. P. Ware)에서 그는 ”우리의 형제들은 인위적인 신조들과 교회 통치법들에 반대를 주장하면서 그들이 진행해왔던 것의 적법한 이슈를 보지 못했다. 이것을 행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의 세상통치의 토대에서 쓰레기를 치우고 있었던 것이다.“고 진술하였다.

참고목록

Dunnavant, Anthony L. Ed. Cane Ridge in Context: Perspectives on Barton W. Stone and the Revival (1992).
Hughes, Richard T.
Reviving the Ancient Faith: The Story of Churches of Christ in America (1996).
Stone, Barton Warren.
Biography of Elder Barton Warren Stone, Written by Himself, with Additions and Reflections by Eld. John Rogers (1847), reprinted in The Cane Ridge Reader (1972).
Ware, Charles C.
Barton Warren Stone, Pathfinder of Christian Union (1932).
West, William Garrett.
Barton Warren Stone: Early American Advocate of Christian Unity (1954).
Williams, D. Newell.
Barton Stone: A Spiritual Biography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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